카테고리 없음 / / 2024. 8. 23. 09:00

중세의 지리학과 지도 제작

중세 시대의 지리학은 고대의 지식을 계승하면서도 대항해 시대를 앞둔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초기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TO지도가 주를 이루었지만, 십자군 전쟁과 원거리 무역을 통해 지리적 지식이 확장되면서 점차 사실적인 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했죠. 아랍 세계와의 교류로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 저작이 다시 주목받았고, 항해술의 발달로 해도 제작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중세 지리학의 흐름과 지도 제작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세 초기의 기독교적 세계관

TO지도의 등장

중세 초기 유럽인들의 세계관은 기독교 교리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반영한 것이 TO지도인데요, TO는 라틴어로 '지구'를 뜻하는 'Orbis Terrarum'의 약자입니다. TO지도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을 원 안에 T자 형태로 배치한 것이 특징입니다. 지도의 상단에는 동쪽을 향해 아시아가, 좌우에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자리잡고 있죠. 예루살렘이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며, 에덴동산이 지도 맨 위에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이시도르 지도와 베아투스 지도

TO지도의 대표적 사례로는 7세기 세빌리아의 이시도르스가 제작한 이시도르 지도와 8세기 스페인의 베아투스가 그린 베아투스 지도가 있습니다. 이시도르 지도는 아시아 대륙을 지나치게 크게 그렸지만, 인도양과 홍해, 나일강 등을 비교적 정확히 표현했죠. 반면 베아투스 지도에서는 아프리카 대륙이 남쪽으로 뻗은 모습이 특징적입니다. 이는 잘못된 정보지만, 아프리카 남단의 해안선을 표현한 최초의 유럽 지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존재론적 세계관의 반영

TO지도는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줍니다. 지리적 사실보다는 종교적 의미를 더 중시했던 것이죠. 예루살렘을 지도의 중심에 배치한 것은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고, 에덴동산을 그려넣은 것은 인간의 타락과 종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냅니다. 지도에 그려진 괴물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기도 하죠. TO지도는 지리적 실재라기보다는 당대인의 정신세계를 투영한 상징적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지리학의 영향

그리스 로마 지리학의 계승

8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슬람 세계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습니다. 9세기 바그다드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이를 토대로 이슬람 학자들은 세계 지도를 제작했죠. 특히 9세기의 알크와리즈미는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를 수정하고 보완하여 '세계의 모습'이라는 지도를 완성했습니다. 이 지도는 아프리카 대륙을 인도양과 연결된 섬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에요.

지리학 서적의 편찬

이슬람 세계에서는 외국 여행기와 지리지 편찬도 활발했습니다. 9세기 페르시아의 이븐 쿠르다드베흐는 도로와 국가에 관한 책을 저술했고, 10세기 알마수디는 '황금초원과 보석광산'에서 중국과 인도양, 동아프리카 연안을 상세히 묘사했죠. 12세기 모로코의 여행가 이드리시는 노르만 왕 로저 2세를 위해 세계 지도와 지리서 '로저 왕을 즐겁게 하는 책'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리학 저작들은 이슬람과 유럽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습니다.

지도 제작 기술의 발전

이슬람 세계의 지도 제작 기술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이들은 그리스의 지도 투영법을 발전시켜 정확도 높은 세계 지도를 제작했죠. 특히 원통 투영법을 사용한 알이드리시의 세계 지도는 지중해와 인도양, 아프리카 동해안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했습니다. 또한 항해용 지도인 포르톨란 차트의 제작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어요. 나침반과 항해술의 발달로 이슬람 세계의 해도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동방 견문록

십자군 전쟁과 지리 지식의 확장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의 지리적 세계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중동으로 원정을 떠난 십자군들은 이슬람 문명을 직접 목격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죠. 특히 콘스탄티노플과 키프로스, 안티오크 등 동지중해 도시에 대한 정보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 저작이 재발견되기도 했어요.

동방견문록의 유행

13세기 중반, 몽골제국의 팽창으로 유럽에서 중국에 이르는 육로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동방견문록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전해주었죠. 폴로 일행이 귀환 후 제작한 카탈란 지도 도판인 카티노 원반도는 중국 남해안과 인도양, 아프리카 동해안을 그린 최초의 유럽 지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오도리코, 마리뇰리 등의 여행기가 동방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을 키웠습니다.

지도 제작에 끼친 영향

십자군 전쟁과 동방 여행은 유럽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지도에는 콘스탄티노플, 트리폴리, 바그다드 등 중동 도시가 표기되기 시작했죠. 특히 1154년 제작된 특히 1154년 제작된 에브스토프 세계 지도의 경우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와 함께 아프리카 북부 해안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요, 이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얻은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중세 후기에는 실제 여행과 견문을 통해 축적된 지리 정보가 지도 제작에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항해술의 발달과 포르톨란 지도

나침반과 항해 기술의 발전

12세기 이후 나침반이 유럽에 도입되고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지중해 무역이 크게 번성했습니다. 제노바,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들은 동방 무역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죠. 상인들은 안전하고 효율적인 항해를 위해 정확한 해도를 필요로 했고, 이는 포르톨란 지도의 발달로 이어졌습니다. 한편 대서양 연안 국가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는 향료 무역을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항로를 모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포르톨란 지도의 등장

13세기부터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포르톨란 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포르톨란 지도는 나침반을 이용해 제작된 항해용 해도인데요, 항구 도시와 해안선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격자 모양의 나침반 장미도가 그려져 있어 선박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죠. 초기의 대표적 사례로는 1311년 제작된 피에트로 베스콘테의 포르톨란 지도가 있습니다. 이 지도는 지중해와 흑해, 서유럽 연안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요.

카탈란 지도와 대서양 탐험

14세기 들어 카탈루냐 지방을 중심으로 포르톨란 지도 제작이 더욱 발전했습니다. 1375년 Abraham Cresques 부자가 제작한 카탈란 지도는 당시 카탈루냐 왕실의 해상 패권 야욕을 반영한 걸작이에요. 52장의 도판으로 구성된 이 지도첩은 지중해뿐 아니라 대서양과 발트해, 홍해, 인도양 등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고 있죠. 아프리카 서해안이 카나리아 제도 남쪽까지 그려져 있는데요, 이는 당시 진행되던 대서양 탐험의 성과를 보여줍니다.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프리카 탐험에 박차를 가하면서 유럽의 지리적 지평은 더욱 넓어졌습니다.

결론

중세 지리학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해 점차 경험적 지식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 지리학과 항해술, 여행기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죠. 대항해 시대를 준비하는 기술적 토대이기도 했던 포르톨란 지도의 발달은 중세 지리학의 총화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의 지도들은 인공위성 사진과 GPS를 이용해 제작되지만, 그 뿌리에는 TO지도와 포르톨란 지도로 대표되는 중세인의 노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상상력, 경험을 통해 지식을 확장해가는 중세 지리학의 모습에서 우리는 여전히 배울 점이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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